로그인 | 회원가입 | 마이페이지 | 내주변검색

아카이브

전라남도 목포시 / 전시 제한적자유/조창환전

전시기간 2020-02-11~2020-02-29
전시장소 성옥문화재단 기념관 갤러리
전시장주소 전라남도 목포시 영산로11 지도보기
오픈시간 10:00AM~05:00PM
관람료 무료
기관명 성옥문화재단
문의 061-244-2527
웹사이트 http://www.instagram.com/benjaminchanghuancho

상세내용

 조창환 Benjamin Changhuan Cho

1994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졸업

2011~2019 예술프로젝트 퍼즐H


개인전

2020 제한적자유,성옥문화재단,목포

2019 자문밖문화축제오픈스튜디오,조창환스튜디오

2019 Beyond the world,아트스페이스퀄리아,서울

2019 KALI,카페더나눔,남양주

2019 Grotesque in Beauty,짙은갤러리,홍성

2018 더 가든-그로테스크와상상정원,아트스페이스퀄리아,서울

2018 평창올림픽아트페스티벌,호텔인터불고원주

2017 가든No9 퍼즐H기획초대전,갤러리울,고양

단체전

2019 평창동이야기전,아트스페이스퀄리아,서울

2019 남북이산가족예술프로젝트"그리운얼굴",도라전망대,파주

2019 서로를찾아가는나눔의여정,목포대학교,갓바위미술관,목포

2019 PAMAF,의정부예술의전당

2018 객관적 우연전,아트스페이스퀄리아,서울

2018 남북이산가족예술프로젝트“그리운얼굴",호텔인터불고원주

2017 경기북부작가어울림전,의정부예술의전당

2016 가을프로젝트"꿈과일상",양평군립미술관

2016 세계미학자대회 대중예술축전특별전,아트쎈터화이트블럭,헤이리


규격, 제한적 자유, 그리고 탈영토화 

-조창환의 조형작업

서길헌(미술비평, 조형예술학박사)

한때 인류는 열심히 세계의 속살을 파헤치고 사물의 얼개를 해독하여 이를 바탕으로 문명의 금자탑을 쌓아 올렸다. 문명은 점점 분화하였다. 본다는 행위도 그만큼 세분화되었다. 한동안 미술은 절대주의나 미니멀리즘이라는 비좁은 영역으로 축소되고 점점 더 막다른 골목으로 퇴행하였다. 이후로 그것은 신표현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해체주의의 회생경로를 거치면서 규율에서 풀려나 다시 잡다한 이야기로 재발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시 규범의 돌쩌귀에서 풀려난 미술은 이전의 아날로그적 자유를 망실하는 대신에 디지털적 규격이 허용하는 만능통로의 열쇠를 얻었다. 디지털은 모든 것을 이진법으로 여과하여 접촉면이 서로 맞아떨어지는 공통의 코드로 통일했다. 그것은 표준화된 호환성을 기반으로 세상에 유비쿼터스적 소통의 자유를 불러왔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기존의 사물을 잘게 부수어 최소 단위의 조각으로 규격화하고 다시 그것을 짜맞추어 새로운 대상으로 만드는 것으로 요약된다. 조창환의 작업은 바로 이러한 미학적 스토리라인의 한 축에 잇닿아 있다. 그는 개인의 ‘예술가 되기’라는 약한 고리를 벗어나 보다 본원적인 창조성의 행위를 찾는다. 그것은 세계의 구조를 인수분해하여 그것을 다시 짜맞추는 행위와 같다. 즉, 몇 가지 단순한 규격으로 세상을 짓는 원칙을 만들어 그로 하여금 창작행위를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예술가가 중심이 되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구속적 프로세스에 끌려가는 대신에 몇 가지 제한된 조건들에 의해 창작행위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스스로 작동하도록 풀어놓는 것이다. 대개 작가가 모든 작업의 과정과 결과를 통제하려 함으로써 자유를 잃을 때, 거꾸로 그는 이러한 제약의 고삐를 풀어놓음으로써 오히려 더욱 창의적인 자유를 얻는다.

퍼즐 조각이나 레고 블록의 요체는 각각의 모듈이 동일한 규격의 요철이 있는 지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서로 어떠한 짝들과도 맞물릴 수 있다. 그것의 핵심은 표준화된 호환성이다. 그것은 파편화된 모듈에게 어느 형체라도 짜맞추어 낼 수 있는 가변성을 부여한다. 조창환은 이러한 모듈의 특성을 응용하여 기존의 형상을 허물고 그로부터 얻은 비교적 균일한 패턴의 잔해를 사용하여 다시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간다. 그렇다면 기존의 대상과 새로이 만들어지는 것 사이에 생겨나는 차이는 무엇일까.

우리는 부지중에 미술작품에는 작가의 개성이 담겨야 한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이때의 개성이란 자아에 뿌리를 내리고 확고한 자기결정권을 가진 자신다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자아는 늘 불완전한 미궁 속에 있다. 들뢰즈(Gilles Deleuze)는 ‘아티스트 되기’라는 삶의 방식을 일종의 탈영토화에서 재영토화에 이르는 여정으로 이야기한다. 아티스트는 우선 자신을 벗어나서 새로운 미지의 땅으로 가야한다. 라깡(Jacques Lacan)의 거울단계라는 정신분석학적 개념 역시 또다른 타자로서의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세계 속에서 항상 타자와 만나게 된다. 타자와 만남으로써 비로소 자아는 자신만의 비좁은 땅을 벗어나 탈영토화 된다. 

일찍이 자아라는 개념은 이성을 중심에 놓은 이기적 세상에 봉사하였다. 그것은 세상 속에서 자아의 오만과 편견을 확대재생산하여 인류문명을 위험한 타자와의 대결구도로 이끌어갔다. 그리하여 무수한 극단적 대립을 낳고 전세계를 파국적 경쟁과 끊임없는 분쟁의 위기로 몰아넣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반면에 조창환의 조형작업은 자아와 타자의 대립을 무화시키는 사유와 시각적 자유에 발을 디디고 있다. 진정한 자유는 다른 것을 서로 잘 받아들이고 자신을 내어줄 때 자아의 아집을 벗어나 드넓은 화해의 바다에 이른다. 모든 것이 정해진 규격에 맞아떨어진다면 서로 다른 어떤 것과도 자유롭게 맞물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제약에서 벗어나 더 자유로운 만남을 낳는다. 이른바 자유를 제한함으로써 자유로워진다는 생각은 일견 모순이지만 이 모순어법은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모든 것이 점점 네트워크로 연결되어가는 기술혁명의 시대를 꿰어주는 유니코드와 같다. 우리는 이미 모든 유비쿼터스적 소통이 이루어지는 시대의 한복판에 와있다. 아날로그시대의 표준화공정은 기계 산업의 발달을 견인하였다. 또한 디지털시대에는 온갖 사물의 생태계가 0과 1로 규격화된 두 가지 모듈의 무한조합으로 탈바꿈되었다. 그것은 모든 사물들이 다른 어떠한 것들과도 서로 맞물리는 사물인터넷 시대를 불러왔다. 조창환의 작업은 이러한 시대적 흐름과 궤를 같이 한다.

크기가 다른 몇 가지 규격에 따라 만들어진 패키지 박스는 어떤 사물이라도 용이하게 포장할 수 있다. 지난 작업에서 조창환은 먼저 그러한 포장 용도로 쓰이는 종이 박스를 잘라서 일종의 조각난 모듈을 만든 다음, 그것들을 어긋나게 이어 붙이고 쌓아 올려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어떤 미지의 형상을 조합해냈다. 그러한 작업에서 구상하는 형태는 단지 작가의 머릿속에만 있을 뿐이고, 구체적인 것은 박스 조각들을 붙이고 쌓아가는 과정에서 모듈들이 자연스럽게 허용하는 방식으로 결정되었다. 여기에서 작가의 창작 행위는 잘라낸 패키지 박스의 모듈이 가진 속성, 즉 색깔이나 모양이 촉발하는 우연성에 상당부분 좌우된다. 인간의 두상과 같은 안드로이드 형태를 갖추는 작품 계열은 작가의 구상단계에서의 막연한 상상적 스케치가 현실화되어가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우연적이고도 필연적인 창의성을 반영한다. 안드로이드는 인간의 형상이 가진 표준 형태를 기본으로 한다. 인간에게서 개성을 생략하면 공통적인 형상과 기능이 남는다. 원칙적으로 인간의 개성 또한 지놈(genome) 분석을 통해 모두 유형화될 수 있다. 그렇게 해체된 요소들을 모종의 알고리즘으로 재배열하면 새로운 문명을 낳을 안드로이드 회로가 될지도 모른다. 그 결과는 인간의 개념을 새로이 정의해야 할 정도로 근본적인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문명에서 계열적으로 파생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을 파생시킨 공통적인 모듈인 지놈의 속성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러한 작업의 핵심은 기본적 형태나 구조로 모듈화된 패키지 박스가 필연적으로 만들어가는 미시적 차원과 그것이 결구해내는 전체적인 형상이라는 거시적 차원의 우연적 결과에 있다. 물론 작가는 어렴풋이 어떤 그림을 구상하고 있지만, 그것은 패키지 박스 모듈의 조건에 따라 현실화되는 과정을 통해 미지의 형태로서 파생된다. 패키지 박스로 만든 모듈은 원래 지니고 있던 색깔이나 도안 등이 분절된 상태에서 어떤 전체의 부분을 만들어간다. 

기존의 패키지 박스가 가진 원래의 용도와 규격은 와해되고, 본래 가지고 있던 또다른 요소인 평면성과 색깔, 맥락없이 잘린 디자인과 타이포그라피 등이 전혀 새로운 조형적 질서를 만들어간다. 모듈의 특성은 동일성이 만들어내는 통일성이다. 기본적으로 동일한 구조를 가진 그것은 전체를 이뤄갈 때 동일성의 특성을 반영하지만 전체의 형태는 개개의 모듈과는 다른 것으로 구현된다. 그것은 퍼즐 조각이나 레고 블록처럼 조립되어 또다른 전체를 만들어가는 개별적 단위의 역할을 한다.

위의 작업에서 그것이 두상과 같은 구체적 형태를 따르지 않고 비정형의 기하학적 형태를 만들어가는 경우에는 모듈이 가진 동일한 구조에서 유발되는 연쇄적 프랙탈 구조를 빚어낸다. 프랙탈은 부분이 가진 속성이나 모양이 전체의 구조에 담기는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의 모듈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구조인 다른 모듈과 결합하여 전체의 일부를 만들어 가지만 원래의 색깔이나 약간씩 차이를 보이는 형태는 그것이 불어남에 따라 차이를 더 키워 종국에는 전혀 다른 전체를 만들어낸다. 여기서 작가는 자신의 의도나 조형의지의 개입을 최소한으로 억제하여 모듈이 거의 스스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단지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을 것이다.

이는 매우 놀이적이면서 고정된 자아의 영토를 벗어나는 탈영토화 과정이다. 여기에서 발현되는 전체적 형태는 동일한 형태가 비슷한 듯하면서도 두 번 다시 되풀이될 수 없는 비가역적 우연과 필연의 만남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전체형태는 모듈의 가변성이 낳는 우연에 의한 창의적 생성의 결과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결국 기존의 패키지 박스가 가지고 있던 글자나 디자인의 색깔 등과 같은 요소가 가진 스토리들이 분절되어 나타나는 양상에 따라 새로운 스토리라인이 구성된다. 기존의 스토리가 와해되어 우연적인 스토리 요소로 환원되고 그것은 다시 모듈 자체의 특성을 머금음으로써 필연적으로 다른 것들과 쉽사리 결합하면서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어 낸다. 이것은 산업적 환경의 부산물들이 작가의 최소한의 개입에 따라 스스로 새로운 구조로 변이되어가는 양상으로 정리된다. 그것은 작가의 의지 보다는 기존의 분절된 개별적 스토리에 따라 무한히 변형될 수 있는 가변성을 특징으로 한다. 그것은 서로가 어딘가 겹쳐지듯 닮아 있지만 각각의 작업의 결과가 매번 다른 시각으로 나타난다. 즉, 전혀 다른 이야기는 아니지만 같은 이야기의 다른 표현처럼 구현된다. 이는 동일성이 다른 강도와 리듬으로 반복되어 만들어내는 차이와 같다. 쟈크 모노(Jacques Monod)가 <우연과 필연>에서 말한 것처럼 자연계에서 우연이 만들어내는 것이 필연과 결합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합목적, 즉 전체성이 세계 안에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놀이의 핵심은 작가의 의지는 최소화하고, 자연 또는 인간 밖의 질서나 규칙이 조형행위를 만들어내는 자연발생적 자유에 있다.

작가 조창환의 이러한 작업의 의의는, 몇 가지 정해진 규격을 따름으로써 자유의지가 제한받는 것 같지만 그것은 오히려 서로 자유롭게 만날 가능성을 열어 놓은 규격적 자유가 창출해내는 무한변이적 질서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작가가 어떤 형태를 고집하는 방식으로 자아를 드러내어 무한변이를 낳는 조형적 자유를 축소하지 않을 때만이 가능해진다. 그가 2017년 5월 ‘갤러리 울’에서 김성호 작가와 ‘퍼즐 H’라는 그룹의 이름으로 발표한 <가든 No.9> 시리즈에서는 다른 작가와 작업의 몫을 일정부분 나눔으로써 작가 개인의 개입을 최소화하려 한 정황이 뚜렷한데, 여기에서 이러한 작업의 미덕은 충분히 확증되었다.


미술은 놀이적 측면을 통해 교육적인 효과를 얻기도 한다. ‘가베’ 조각은 아이들에게 여러가지 색깔과 형태를 가진 조각들을 끼워 맞추는 경험을 통해 세상을 풍부하게 보고 받아들이는 훈련을 하는 교육용 도구이다. 근래의 작업에서 조창환은 이러한 교육용 자료에서 얻은 색편이나 특정 기능을 가진 기존의 몸체에서 떨어져 나온 여러가지 형태의 부품 같은 요소들을 찾아내어 준비한 개개의 오브제를 다양한 형태와 색깔의 스펙트럼을 가진 모듈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것을 두개의 영역으로 분리된 캔버스 프레임의 뒷면의 공간을 이용하여 배열해 나감으로써 부분적인 ‘프레임’에 나뉘어 있지만 그 안에서 서로 다양한 관계로 공존하는 전체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 작업의 결과는 점점 무한증식해가는 어떤 첨단 도시의 풍경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가 포화상태의 도시문명 속에서 탐험하듯이 찾아낸 각종 플라스틱 오브제의 색깔 모듈들은 그 자체 안에 이미 그것들을 쏟아낸 도시의 얼개를 품고 있는 자신만의 프랙탈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가 다양한 색깔과 형태의 오브제 파편들을 찾아내는 작업은 기존의 모체에서 떨어져 나온 사물들에게 새로운 환경과 영토를 찾아주는 동시에 그것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규격과 제한적 자유를 통해 저절로 조형 행위를 수행해내는 프로세스로서 스스로를 탈영토화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가든 No.9> 작업에서 꽃봉오리 구조와 같은 잠재적 형태가 계속적으로 증식하여 공간을 채워가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이처럼 그의 작업은 조형 요소 자체의 내적 질서에 의해 스스로 증식하여 세상을 채워 나간다. 그것은 어딘가 수분이 거의 없는 극한의 건조한 환경에서 씨앗을 보호하기 위해 돌돌 말린 채로 지내다가 아주 오랜만에 비가 오거나 하여 다시 수분을 만나면 생생한 식물로 되살아나는 부활초(復活草)의 생성을 닮았다.


##조창환 #조창환작가 #컨템포러리아트 #유비쿼터스 #제한적자유 #탈영토화 #mixed_media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