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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 전시 함연식 - Distention

전시기간 ~2019-08-31
전시장소
전시장주소 서울시 지도보기
오픈시간
관람료
기관명 박재학
문의
웹사이트

상세내용


전 시 명 : 함연식 - DISTENTION

전시기간 : 2018. 12. 25. - 2019. . 25.

전시장소 : 청담갤러리

작가소개 : 함연식 작가는 홍익대를 졸업하고 구조주의를 추구하는 미술가 동호회에 활동하였고 우리의 전통적인 한지작업과 채색작업으로 담색계열의 작품활동을 추구하고 있는 작가로서 성장과 진화의 시초는 팽창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구조주의 관점에서 사물을 주시하고 이를 통하여 새로운 Pharadigm이 형성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오픈시간 : 월 - 금 :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

관람요금 :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

주소 : 서울 강남구 학동대로 청담갤러리

문의 : 010-8744-9053, 02)511-9051

웹사이트 : http://www.artfon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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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TENTION, Coloring Korean paper, 

이 전시는 대한민국 예술의 세계화와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여 새로운 미술시장을 형성하기 위하여 설립한  CNDARTPROJECT에서 기획하고 처음으로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여 기획한 전시이다.

함연식작가의 작품에 대하여 평을 한 홍가위 박사의 글을 첨부한다.

함연식의 종이 작업에 대해서: 

[Copyright©2016 by Kai Hong] 

 

[1] 서문: 단색화 화가로서 함연식 

최근에 자생적 한국 현대화를 표방하는 전시가 봇물을 이루고, 책도 (전시 圖錄 포함하여) 여러 권이 출판 되었다. 지난 몇 년, ‘한국 단색화’가 글로벌 아트 마켓에서 주가가 올라가고 국제미술계에서 새롭게 주목 받고 있다고 한다. 단색화가 대표적인 한국적 ‘모던아트라도 한다. 그런데, 이 가장 대표적 한국적 현대화는 어떻게 하여 단색화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일까.  사실 어떤 이름 붙이기에 있어서도 개념적 내용이 결여 되어 있는 명명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인상파니 큐비즘이니 이런 이름들이 그냥 3동 아파트니 4동 아파트니 하고 명명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언어철학에서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중요한 철학적 문제로서 20세기 후반 최고의 천재 철학자라고도 불리는 Saul Kripke의 최대의 철학적 업적이 담긴 책이 바로 Naming and Necessity가 아닌가.   

인류 역사상 서양문명의 역사적 진행 속에서 역사적 단절이 처음으로 야기된 상황을 ‘현대성(modernity)’이라 칭할 때 모노크롬 회화로 명명되는 스타일의 회화는 예술분야에서 일련의 현대주의 또는 전위하는 이름의 양식적 유행의 하나로 나타났다. 이 서양 모노크롬 회화 (monochrome painting)의 출현은 서구 현대 미술사의 역사적 변증법적 행군 속에서 역사적 필연성의 논리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서양문명이 겪은 현대성이라는 역사적 단절의 트라우마를 내부적으로 경험하지 못하고 외부적으로 서양문물로부터 자극 받아 그것을 흉내 내어 서구화를 통해 비로서 현대화를 꾀하면서 서구와 똑 같은 역사변증법적 논리에 근거하려는 방법으로는 단색화의 필요성에 절대로 도달할 수 없다. 즉, 서구 현대미술에서는 결국 ‘예술의 죽음 (End of Art)’을 향해 가차없이 진군하는 과정에서 모노크롬 회화가 임시방편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이지, 그것이 무슨 새로운 회화의 문법을 또는 새로운 예술세계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스탠리 카벨이 지적하였듯이, 약 19세기 중반 서구의 작가, 화가, 작곡가 등은 자기들이 계승한 예술행위를 하기 위해서 전제 되어야 하는 사회적 규범 (또는 게임의 법칙, 또는 문법)이 붕괴되어, 더 이상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술행위인지를 규정해 줄 판단의 잣대가 없어져버렸다고 믿었다. 어떤 문장이 문법에 맞는지 아닌지를 판단해 줄 형식적 규정이 없다면, 그 언어는 소통의 도구로서 무용지물인 것인데, 19세기 중반 서구 예술의 상황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그래서 카벨은 현대예술의 상황을 특정 지워주는 것은 항상 산재한 사기의 가능성이라는 것이다. 약 19세기 중반부터 서구회화의 전통을 역사적으로 해체 (historical deconstruction of representational painting) 하여 약 1960년대 중반의 스텔라의 shaped canvas 즉 literal object (그렇게 생긴 캔바스를 그림으로)로 귀결되어, 소위 말하는 미니멀 아트의 출현으로 이어진다. 이 미니멀 아트의 한 버전으로 나타난 모노크롬 회화는 일련(一連)의 서구 현대미술사 속에서 재현적 회화의 역사적 해체 과정에서 나온 양식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단색화라는 회화는 아무런 개념적 콘텐트가 전무한 것이 실체다.  

한국에서 1970년대에 출현한 형상 없는 단순한 색상의 서양화만 단색화이며 전통 동양화의수묵화는 단색조의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왜 단색화가 아닌가? 왜, 한국서양화가들이 하는 추상 회화만 단색화란 말인가? 사실 70년대 80년대엔 한국현대 미술계의 평단에서는 단색화란 말을 쓰지 않고 ‘평면화’를 유행어로 삼아 ‘한국적 현대추상’이라는 이론적으로 설득력 없는 담론을 펼치지 않았나? 바로 70년대의 이런 한국화단의 시류에 동참하지 않고, 자기 길을 가기 시작한다. 윤형근 자신이 말한다. “1973년부터 내 그림이 확 달라졌다. 서대문 교도소에서 나와 홧김에 한 것이 계기였지. 그전에는 색을 썼었는데 색채가 싫어졌고, 화려한 것이 싫어 그림이 검어진 것이지. 욕을 하면서 독기를 뿜어낸 것이지. 그림엔 살아온 것이 배인 거야.” 당시 한국서양화단의 윤형근의 동료화가들은 기하학적 또는 제스춰럴(gestural) 추상 회화에 열광하고 있었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이 한국의 서양화가들은 그런 의 抽象 繪畵가 당대에 가장 advanced 된 회화樣式이라고들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서구의 현대과학과 기술뿐만 아니라, 서구에서 당대에 가장 뜨는 현대 미술 양식은 당대에 가장 진보된 예술양식이어서, 그것을 그때 그때 재 빨리 수용하고 따라잡아 같은 수준에 올라가겠다는 그런 의식이 한국만이 아니라 일본을 비롯한 非西歐 동양의 화가들한테 팽배해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당시 한국과 일본에서의 주류 현대 서양화가들이 일반적으로 갖고 있던 현대미술에 대한 철학과 태도는 그런 것이었다. 함윤식이 다니던 홍익대학교 서양회화과 교수들의 성향도 이와 다르지 않았고, 그가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1970년대 중, 후반의 한국 서울 화단의 분위기가 그러하였다. 그러나, 함 연식은 남이 하는 것을 따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서구중심부에서의 유행을 무조건 교과서적으로 수용하는 다분히 문화사대주의에 젖어 있는 그의 대학교수나 선배 화가들의 뒤를 따르기를 거부하였다. 니체 (Nietzsche)가 말하는 소비사회화 되어가는 부르죠아 산업사회에서의 무리 근성을 그도 배척하였다. 현대서양회화를 전공했고, 그래서 서양회화작가들이 공통적으로 체화(體化)한 서양회화세계의 하비투스 속에서의 여러 경향을 그 자신도 무의식적으로 習化 또는 體化하였을 것이다. 서양회화의 재료와 서양회화역사의 담론은 물론 현대주의 서양회화의 미학적 문제 의식 까지 자신한테 주어진 여러 가지 한계 속에서 체화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1970년대 중, 후반기의 한국서양화가들과는 다른 길을 걷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중요한 현대화가로서의 선택이 필요하였다. 즉, 서양회화의 재료인 오일 페인트나 캔바스 천 대신, 그는 漢紙를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대신 한지의 재료적 특성만을 살리고 활용하여 실제적인 오즈제를 만드는 것의 작품행위를 하기로 한다. 마침 서구의 현대주의 미술은 평평한 캔바스의 공간에 오일페인트과 부러시를 도구로 삼아 무엇을 재현하거나 표현하여 채우는 식의 회화는 서구현대주의 미술사의 역사적진화의 논리가 더 이상 허용치 않는 다는 인식이 가장 진보된 역사의식과 현대미학적 문제의식을 갖춘 화가들 사이에 팽배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서구현대주의 회화의 역사적 진화과정을 그대로 답습하면서도, 서구현대주의 화가들의 당면한 현대미술사적 또는 현대미학적 문제의식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평면화라고 부르던 한국형 추상회화를 단색화로 바꾸어 부르면서, 마치 그런 류의 작품 하기가 범우주적이고 가장현대적인 예술언어인 것처럼 착각하고 밀고 나가는 뻔뻔함을 함연식이라는 올곧고, 진실한 예술가에겐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재현적 허구의 입체적 회화를 거부하는 서구의 현대주의 회화는 회화의 마티에 (재료 또는매체) 자체의 존재론적 조건에 대한 미학적 탐구를 통해 주어진 매체의 존재론적 조건에 충실한 그래서 평면화로서의 추상을 추구하게 되었었다. 그러나 그런 논리를 궁극으로 밀고 가면, 결국에는 1960년대 중반의 그런 형태의 캔바스 (즉 Frank Stella의 또는 Kenneth Noland의 Shaped Canvases)로 환원된다. 서구현대 회화에서 화가들은 캔바스의 빈 공간을 맘대로 채울 자유를 잃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Olitski의 Willemite Vision #1 같은 작품은 그 거대한 작품의 전부는 단색 또 무색의 흰캔바스로 비어 있고, 한창 눈을 씻고 자세히 보면 가장 자리에 마치 실수로 칠하여진 조금 붓자국이 있을 뿐이다. 마치 거대한 캔바스의 중심부에서 축출당하여 변두리로 쫒겨나간 형국이다. 마이클 후리드 (Michael Fried)는 이를 가르켜 내적후레이밍 밴드 (internal framing) 라고 부른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일련 작가들, 특히 져드 (Donald Judd)와 댄 훌라빈 (Dan Flavin)이나 로버트 모리스 (Robert Morris)는 아니 언제 까지 우린 계속 이런 저런 형태의 캔바스나 만들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라고 한탄을 하게 되며, 그래서 그들은 그럼, 그림을 그릴게 뭐 있어? 세입트 갠바스는 그냥 그렇게 세입트된 캔바스라는 오브제일 뿐이 잖아. 그럴바에야 그냥 이런 저런 실제적인 오브제를 만들면 되잖아!라는 생각에 미치게 되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모리스의 그냥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박스 (Box) 또는 다른 유사한 작품들을 Richard Wollheim은 미니멀 아트라고 불렀다. 즉, 미니멀한 콘텐트의 자칭 미술작품들이란 뜻이다. (마이틀 후리드는 이것은 개념적인 오류이고 Literal Art라고 불리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요 개념이라고 주장하였다.)  

 

   바로 그러한 현대주의 회화에서의 문제 의식들이 1970년대에 팽배해 있었는데, 함 연식은 서구현대주의 회화가 추구하는 평면화는 현대주의 현대 평면화 담론이 내재적인 논리를 궁극으로 밀고 가면 회화는 끝나고 그냥 실제적인 오브제만 남게 된다는 그것을 자신의 문제 의식으로 삼았다. 그는 동양의 수묵화의 재료인 漢紙(닥종이)의 고유한 재료적 정체성을 탐구하여, 그의 예술적 표현의 수단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한국적 한지 제작법을 처음부터 다시 배웠다. 닥나무의 재배에 필요한 모든 것들, 닥나무의 특성들, 닥나무를 자르고 말리는 모든 과정을 치열하게 연구하면서, 닥나무의 장인이 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한국의 고유한 닥나무 제조 과정이 일본이나 중국의 그것과 다른 데, 왜 달라야만 하는 지 등을 연구하게 된다. 즉, 독특한 기후 조건은 물론 닥나무가 자라는 지질, 지형 그리고 풍수적 영향까지 고려해야만 된다는 것들 등등. 서양회화의 문제의식이 미학적 출발점이지만, 그는 동양적 미술 재료인 종이의 특질을 깊이 연구하여, 그 재료성을 자신 예술표현의 기본 요소를 삼았다. 즉, 장인적 제작과정의 정직성과 순수성이 합쳐져서, 오늘 날의 혼탁한 국제미술조건 속에서 유일하게 진실과 정직성의 순수 예술 정신으로의 회귀가 가능하여, 함 연식은 콘템퍼러리 아트의 사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 에세이 후반 부에 되돌아 와서 부연하게 될 것이다.  

 

[2] 함연식의 한지 미술  

       오늘 날, 고도로 산업화된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공장에서처럼 어떤 연산법적인 기계적 공정을 거쳐서 나오고 있다. 그것이 비단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쓰는 공산품뿐만이 아니다. 장인정신은 모든 인간 삶의 부분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그런데 그 장인정신이 예술작업에서도 사라져 가고 있다. 놀라운 것은 동양적 정신을 계승하여 한국적 현대 회화의 지평을 전개하겠다고 호언하는 누구라면 다 알만한 저명한 한국의 화가들마저 이런 기계적 공정을 통한 작품들을 다량 생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 국제적으로 유행하여 그림 값이 열 배 이상 뛰었다는 단색화 작가들의 경우, 만일 그들이 표방하는 전통동양적 예술정신을 살려 현대화하고 있다는 주장이 허위로 판명될 때, 과연 주식시장의 거품처럼 그들의 작품 값이 떨어져 버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동양예술정신은 기계적 공정을 거부한다. 그냥 설계도만 제시하고 나머지는 공장(화가의 스튜디오)에서 다수의 노동자들이 값싼 노동을 제공하여 다량 생산하고 있다면, 그것은 동양의 예술철학과는 완전히 대치되는 다분히 서양적인 사고 방식이다. 동양예술작업은 다분히 수행자적 자세로 하나 하나의 모든 과정을 장인정신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설계도만 그려주고 나머지는 공장의 노동자들이 구체적 물품으로 만들어 내어, 어떤 화백의 예술작품으로 포장되어 세상에 나오는 것은 동양예술정신에 위배 된다고 볼 수 있다. 예술문화 영역에서의 서구적 사유와 동양적 사유의 가장 커다란 차이 점 중의 하나가, 서구에서는 예술가가 작품을 한다는 것은, 우선 작품 구상, 그것을 연습지 위에 스케치하여 구성하고, 조각의 경우엔 미리 조그만 스케일의 모델을 만들어 본 다음에야, 캔바스위에 실제로 오일 페인트를 써서 원하는 크기의 실제 작품으로 구현한다. 그러나, 프랑스의 저명한 중국학자, 프랑슈아 쥴리엥는 중국의 고대 예술가들은 그런 미리 구상하여 구성해 본다는 콤포지션의 개념이 아예 없었다고 지적한다. 미리 모델링하여 작품의 공정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중국적 예술사유의 문법 속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북송시대의 중국수묵산수의 대가인 구오시 (郭熙)의 경우 어떤 스켓치 같은 작업 없이, 목욕재게하고 마음을 고요히 한 다음, 한지를 펼쳐놓고, 묵필을 들어 마치 신들린 듯이 그 순간부터 산수의 그림을 그麗나갔다고 그의 아들 구어쓰는 임천고치에서 서술하고 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구오시가 그린다기 보다는 구오시의 손 끝으로 (그의 손을 미디엄으로 삼아) 그가 그리는 산수의 모티브가 스스로 나오는 것이었다.  산수화를 그려도, 그 산수의 앞에서 미리 스켓치하여, 실제 그림을 그릴 때 참고하는 법도 없었다. 그런데, 동양의 전통예술정신을 묵묵히 지키면서, 바로 그들이 (소위 단색화 화가들) 말하는 단색화를 만들어 내는 화가가 있으니, 그 중의 하나가 바로 함연식 이다. 함 작가는 한지(닥나무 종이)로 만 작업을 한다.  

그는 화가이기 전에 닥나무 종이의 장인이다. 닥나무를 채취하여 만들어가는 모든 과정의 실제적인 체험의 장인정신이 그의 예술가로서의 자세로 그리고 예술정신으로 이어진 것이다. 한지를 “외발 뜨기 전에 펄프상태로 틀에 집어 넣어 압축하여 건조시킨 다음 일정한 굵기로 절단하여, 늘리고, 재단하여 골드 폼(스티로폼의 일종)을 반원주 형태로 가공한다”고 작가가 설명한다. 즉, 이 원주 형태의 종이 골드 폼은 함연식 작품을 구성하는 기초 단위요 세포로서 작품(Work of Art)으로서의 생명력 있는 존재감을 갖게 하여주는 구성 요소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만의 결이 있다. 그래서 그것만이 갖는 유일한 존재감이 있는 것이다. 닥나무들도 마찬가지고 닥나무에서 추출된 펄프도 그 순간부터 그것만의 질감과 결을 갖게 된다. 서양의학에서의‘약’은 화학적 반응을 몸체에 일으켜 어떤 몸의 증상을 완화시켜 준다. 반면에 한의학에서의 약은 서로 다른 기()의 특성을 보완하여 몸의 균형을 되찾아 치유하는 것으로 서양의학에서 추구하는 치유의 방법과는 하늘과 땅 차이의 相異 치유의 철학이다. 함 작가가 쓰는 닥종이 한지로 만든 골드 폼 구성 요소들도 각기 고유한 기의 강도, 질감 등을 갖고 있을 것이고, 마치 음악에서 다른 음질의 구성요소들이 모여 화음을 이루고 그러면서 또 전체적인 음악적(소리적) 패턴을 발산하여 인간의 마음을 그리고 영혼을 울리고 치유할 수 있듯이, 함 작가의 한지로 만들어진 구성요소들도 서로 모여 화합하여 캔버스 전면을 통하여 움직이는 물결처럼 또는 숲의 울창한 나무들이 바람에 나부끼며 조용한 물결 같은 움직임을 보이듯이. . . 다만, 함 작가의 종이 작업에서는 이런 물결 같은 흐름을 붓으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한지 재료들이 실질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어서, 실제로 기를 발산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하는 실제의 물상들은 나름의 기를 발산하고 있는 것이니까. 그래서, 그의 작품은 실제적인 한지라는 나무 재료에서 나오는 여러 단위의 기의 파장들이 서로 모여 더 큰 장의 기세를 구성하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실체가 있는 것이어서 모차르트 음악에서의 그것처럼 정신과 영혼을 치유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국제 금융자본주의는 계속적으로 새로운 파생 상품시장을 만들어 거품을 띠게 하여 막대한 이윤을 올리면서 거품은 걷어지고 그러면, 또 다른 시장을 만들어 공략하고. . . 그래서 신자유주의 국제금융시장경제를 카시노 자본주의라고도 부른다. 예술시장도 똑 같은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 항상 파리에 그리고 나중에는 뉴욕이나 심지어 독일의 베를린에도 부차적인 2류 예술시장에 불과하던 영국의 런던이 1980년대 말부터 국제적인 전위 예술의 중심지로 부상한 이유 중의 하나도 사실은 국제금융자본주의 전략을 썼기 때문이다. 즉, 런던의 전위예술은 다분히 작위적인 조작 즉,“Mediated Avant-garde”라는 말로 프랑스의 저명한 사회학자 겸 철학자인 피에르 부르디외의 문화자본론을 이용한 런던의 예술상황을 진단하는 연구논문의 발표가 있었다.  2000년대 초반 국제적으로 잠깐 유행을 탔던 “C-Pop(즉 차이나 팝)이라는 이름의 유행으로 국제 미술시장에서 거품이 일었던 것도 사실은 인위적인 거품 만들기였다. 요새, 한국의 몇몇 문화 권력체들이 “단색화”라는 이름으로 막대한 자금을 음성적으로 투자하여 거품현상을 만들고 있는 것도 다 같은 맥락이다. 사실은 “단색화”란 미술은 없다. 원래는 서구의 현대미술의 역사변증법적 진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어떤 역사적 논리 속에서 나오는 회화의 양식이었는데, 그것을 한국말로 번역하여 마치 그것이 무슨 새로운 인상파 또는 신표현주의 같은 미술의 신사조인 양 선전하는 것은 순전히 내용이 없는 광고선전에 불과하며 단색화에 대한 철학도 없다. 한국인들은 원래 백의 민족이라고 불릴 정도로 백색을 좋아했다는 것이 한국화가들이 특히 단색화를 많이 그리는 이유라고 하는데, 그건 논리가 아니다. 그러면 백색화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사실 필자는 단색화라는 회화적 개념은 없다고 주장하면서, 淡畵라는 새로운 담론을 제시한 바 있다. (2013년 8월 Institute of Contemporary Art, Singapore에서 Daam-hua 展 도록 에세이에서 담화의 담론을 제시한 바 있다.) 함연식의 작품 중에 특히 물결을 이루는 무색의 한지 작업은 필자의 담화에 해당하는 예술 장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금년 내에 종이로 유사한 작업을 하는 네 다섯 명(함 작가를 포함해서)의 작가를 아울러서, 한지 작업 담화전을 서울의 큰 화랑에서 개최할 기획을 하고 있다. 조금 더 부연하자면, 2005년의 함연식의 순전히 한지라는 자료를 손과 손 도구로 작업하여 펄프를 만들고 또 거기서 골드 폼을 만들어, 캔버스 전면을 좌우로 또는 우 좌로 흐르는 物波 (matter wave)를 만들어 내고 있는 데, 이 작품은 좀 떨어져서 보면 그것이 주는 순전히 시각적인 효과는 마치 박서보의 描法연작 시리즈의 작품을 연상시킨다. 물론 완전히 다른 개념이고 工程이지만… 박서보는 물먹은 한지를 겹겹이 쌓아 말려서 이루어진 캔버스의 평면을 날카로운 칼이나 뾰족한 막대기 같은 도구로 이리 긋고 저리 그어서 만들어진 반면, 함 작가의 작품은 아예 아무런 긋기나 쓰기나 그런 흔적이 전혀 없이, 순전히 재료를 어떤 공정을 통해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어 그것을 캠버스 크기의 틀 안에 집어 넣어 틈새가 벌어 지면서 좌우로 물결치는 듯한 물파가 생겨나게 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 작가의 작품에서는 어떤 재현적인 흔적이 없어 어떤 종류의 전통미학에서 추구하는 초월주의적인 예술성도 완전히 배제된 상태의 프랑스의 철학자 들레즈(Deleuze)가 주장하는 Onto-aesthetics의 pragmatic practitioner로서의 예술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붓 자국 하나 없는 함연식의 작품은 flush with the real, constructing flows of matter-force (物波) into expressive sensation. 2004년의 함연식의 종이 작업으로서의 조형물은 전광영의 어떤 종이 조형물을 연상시킨다. 다만, 함연식의 작품에서 보다 더 소박함과 담백함이 진솔하게 나타난다. 물론 재현적인 예술 테크닉을 구사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쓴 마티에 자체에서 나오는 실물적인 (immanence의 적당한 한국말이 없어 필자는 여기서 ‘실물적’이란 말을 써본다) affect이지 재현을 통해 표현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더 유명하고 더 떠들썩한 (예술)시장바닥의 posturing (self-proclaimed ‘great’) artists 보다 필자는 이 은둔(隱遁) 形의 함연식이란 작가의 소박하고 겸손해 보이지만, 오히려 더 예술철학자에게 생각할 거리를 주는 작품들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언젠가 시장바닥에 주가를 올리던 작품들의 거품이 살아질 때 (그리고 그럴 시기는 분명히 멀지 않았다), 함 작가 같은 진정성 있게 그리고 시장의 상황을 멀리하고, 자기 작업을 묵묵히 한 예술가들의 진가를 알아볼 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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