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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 전시 [리각미술관] 위영일 개인전, 자의적 설정

전시기간 2019-08-17~2019-10-12
전시장소 리각미술관
전시장주소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태조산길 245 (유량동4-1) 지도보기
오픈시간 11:00 - 18:00 (입장마감 17:30)
관람료 성인 3,000원 / 학생 2,000원 / 미취학아동 및 65세이상 무료입장
기관명 리각미술관
문의 070-4111-3463
웹사이트 http://www.ligakmuseum.co.kr
후원 O

상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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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시 명 : 자의적 설정

● 전시기간 : 2019.08.17 (토) - 2019.10.12 (토)

● 전시장소 : 리각미술관 

● 작가소개 : 위영일

● 오픈시간 : 11:00 - 18:00 (입장마감 17:30)

● 관람요금 : 성인 3,000원 / 학생 2,000원 / 미취학아동 및 65세이상 무료입장

● 주소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태조산길 245 (유량동4-1)

● 문의 : 리각미술관 학예팀 070-4111-3463

● 웹사이트 : http://www.ligakmuseum.co.kr


주사위던지기, 정작 필요한 것은 내부에 없다. /김노암 전시기획자


위영일 작가의 이번 전시에 우리가 보는 것은 라스베가스의 카지노 딜러 또는 뒷골목 길거리 야바위꾼처럼 주사위를 던져서 구한 숫자들의 조합으로 설정한 작품 주제, 소재, 형식 등을 작가가 어떻게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이다. 작가는 미리 설계한 경우의 수들로 몇 가지 조건들을 만든 다음에 주사위를 던져 나온 숫자를 그 조건에 순차적으로 적용하여 미술사를 장식하는 중요한 이념이자 주의, 양식, 논리 등을 제작한다. 인물과 풍경, 따듯한 색과 차가운 색, 크고 작은 형태들, 초현실주의와 팝아트, 표현주의와 개념미술, 추상과 자연주의가 이리저리 얽히고 꼬이고 결합되어 작품이 된다. 이는 경우의 수로 나온 '운'에 따른 수행과정이 곧 창작의 과정이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다양한 방식의 조합은 일종의 괴상한 절충과 혼합, 일종의 유전자 조작을 거쳐 생성된 생물학적 신종(新種)들이다. 그것은 일종의 위영일식 결합술인 셈이다.


한편 작가는 미리 제작된 작품제작장치(창작기계)를 관객과 함께 공동 제작하는 프로그램을 작품화하여 작품의 배타적 소유권과 저작권의 문제를 전면화하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소유권과 저작권을 관객과 공동 소유함으로써 작품저작권을 포기하는 과정을 재현한다. 자본주의의 성립근거인 사유재산권에 대한 비틀기이다. 이런 방식은 이전의 사회적 동의를 얻은 훌륭하고 배울만한 미적 예술적 전통과는 결별한다. 다양한 형태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작가의 창작과정은 마치 유리상자로 가득한 투명한 실험실의 개구리처럼 속속들이 까발려진다. 예술과 창조의 신비한 비의(秘意)는 사라져버린다. 애초에 그런 것은 없었다는 듯 위영일은 자신이 설정한 계획을 밀고 나간다. 전통적인 창작의 의미와 가치는 훼손되고 조소거리로 전락한다. 미술관제도와 전통, 학습되고 전승된 고상한 문화와 미감을 패러디하고 풍자하는 것을 넘어서 그 존립근거를 뿌리 채 거부하는 태도와 위악(僞惡)적 태도를 읽는 것이다. 대상과 주제는 작가, 예술, 미덕 등과 기괴하게 결합해서는 낮은 차원으로 추락해버린다. 그의 작업에서 괴벽한 취향과 이미지에 혼합된 어떤 분노를 느끼는 것은 나만의 착각인가?


위영일은 이전에도 일반적인 팝아트와는 다른 비틀린 영웅이미지와 칼라감각으로 자신의 작업 스타일을 만들어왔다. 과도하게 비대해진 슈퍼히어로들, 신화 속 키메라처럼 머리는 베트맨 몸통은 슈퍼맨, 팔다리는 헐크인 영웅들이 악이 판치는 세계에서 문제해결을 위해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분주했다. 대중문화의 영웅 또는 우상을 소재로 한 회화들이 쏟아져 나올 때 위영일의 그림은 그로테스크했다. 분명 하나하나 뜯어보면 잘 선택된 재료와 칼라와 세련된 표현력인데 한 작품으로 모아놓으니 팝아트와 마니에리즘이 혼합된 분위기를 보여주니, 그의 정신세계가 궁금해지곤 했다. 마치 그의 정신과 감각이 키메라의 그것처럼 느껴졌다. 아마도 그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자신이 서 있고 종사하고 있는 장소와 시간, 시대와 분야의 당면한 문제와 골치 아픈 혼란처럼 보인다. 예술과 창작의 근본적인 가치와 전통적 의미에 대한 불편함이 기괴한 존재들과 형태로 나타나고 또 그것은 전통적인 미술세계에 대한 어떤 전복의 태도처럼 보인다.


예술을 규정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진다. 무한수로 증가하는 해석의 가능성, 독해, 소통의 무한성은 곧 불가능한 차원으로 변하였다. 하나의 작업 하나의 현상을 예술이라고 질문하고 규정하려는 태도와 자세는 역사적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작업 또는 전시는 사적이고 개별적이며 구체적인 한 작가의 관점과 인식, 사건과 기록 등으로 구성된다, 우리는 오직 과거의 예술에 대해서만 알 수 있다. 지금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거나 앞으로 벌어질 예술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에 대해 지속적으로 이야기하고 사유한다. 우리는 창조와 예술에 대해 자주 말할 기회가 있다. 그러나 그것에 관한 우리의 이해에 도움이 될 정보나 지식 또는 의견은 너무 많거나 아니면 너무 적다. 혹 예술의 정의와 예술가의 창조력의 원천에 대해 수많은 의견과 신화가 언어와 개념, 논리와 담론의 형태를 띤 미학이나 비평으로 확대 전승되어왔다. 우리는 예술과 창조의 본질에 대한 복잡하고 다양한 의견들의 집합과 지식에도 불구하고 신이 아닌 한 그 전모를 온전히 알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암암리에 공유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 창조와 예술을 둘러싼 인식은 가지성(可知性)과 비가지성(非可知性)이 유기적으로 혹은 분리할 수 없이 얽혀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보다 영리하게 우리가 알 수 있는 현상과 알 수 없는 현상을 분리하는 전략을 취해 왔다. 그러므로 한 작가의 작업이나 창작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전략이란 다소 지루하더라도 그런 배경을 고려하면서 가장 구체적이고 가장 잘 조율된 언어적인 이해의 과정을 섬세하게 진행하는 것이다.


위영일에게 회화 혹은 예술이란 더 이상 조형이나 개념의 문제가 머물지 않고 더욱이 작가의 손을 떠난 외부의 조건에 대한 섬세한 반응을 이야기하고 있다. 작가의 무력화, 아무것도 자신에게 선택권이 없는 상실감 같은 것. 작가는 현대의 예술문화란 아무리 성찰적이고 사려 깊은 예술적 사유와 표현이 쌓이고 진화하였다 하더라도 결국은 어떠한 결정적 인식이나 선택도 작가 안에 있지 않다는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랫동안 높고 좋은 가치로 인식되어온 창작이란 마치 게임이나 놀이처럼 변한 것이 아니냐는 냉소(冷笑)와 예술가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론적 지위에 대한 회의(懷疑)를 자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술적 창조과정이란 주사위를 던져 나온 숫자의 조합을 통해 작가가 미리 설정한 일정한 조건에 따라서 형태, 칼라, 표현방식이나 양식에 대입하여 표현하는 '노동'을 '기계적'으로 수행하는 데 불과하다. 그러나 매우 정교하고 경탄스런 게임의 규칙이 제시된다. 여기서 '기계적'이란 과거 예술가들이 깊이 고심하였던 영적 또는 미적 고양상태와 비교해 볼 때 이전의 '예술적' 성찰이나 표현과 대비된다.


경영 컨설턴드인 피터 드러커(Peter F. Drucker)의 이야기와 비교해보면 흥미롭다. 그에 따르면 예측불가능하게 변화하는 세계의 사회와 경제문제를 풀기위해서는 결국 정보와 지식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런데 정작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는 자기 안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이 필요로 하는 정보는 스스로의 정보시스템에서는 획득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정보 시스템이란 이미 알고 있거나 확보하고 있는 내부 정보만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나버린 과거의 것일 뿐이니 미래에 도래할 사회, 경제 환경의 변화에 필요한 충분한 정보를 제공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제 생산적인 정보와 지식은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있다는 것이다. 위영일의 작업은 이러한 피터 드러커의 생각과 꼭 닮아 보인다. 피터 드러커, Next Society, pp. 153-154, 한국경제신문, 2000 외부란 결국 전통적으로 예술분야와 관련되지 않은 분야로 여겨졌던 낯선 정보와 지식, 논리와 태도 등이 역설적으로 미래의 예술과 창작에 필요한 것들을 제공할지도 모른다는 통찰이다.


위영일 작가의 이번 작업은 바로 한 작가가 취할 수 있는 기이하고 괴팍하지만 도대체 하나의 작품, 하나의 이미지, 하나의 예술적 의미와 표현이 생성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실험하는 것이다. 작가는 오랫동안 숙련된 표현력과 이미지의 구성, 집요한 자기 언어와 논리를 아주 구체적이고 점적이며 매우 좁게 초점을 맞추는 과정을 모색하였다. 이번 작업은 그러한 모색이 '위영일스러운' 전략과 논리, 이미지를 구성했다고 본다. 그것이 예술적인지 미적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작가보다 혹은 작가만큼 창작할 수 있는 관객, 작품의 저작권을 둘러싼 자본주의 현실의 풍경들에서 보는 예술의 소외 또는 작품의 물신화 등을 읽는다.

만인이 예술가가 될 수 있는 사회는 난감하다. 결국엔 만인이 예술가가 될 수는 있겠으나, 만인이 예술가가 되려하는 것은 정말 기이한 일이다. 만인이 예술가인 사회 보다 만인이 예술애호가인 사회가 더 좋다. 그런 생각이 위영일의 작업에 반어적으로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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